원아님과 공부 후기상춘재, 늘봄의 생활
1.
9월 6일
상춘재
(常春齋)
서울(soul)을
만든
북한산
보현봉에
그
보현봉
산맥이
북악산과
이어져
북악산
밑에
터전을
잡은
서울(soul)의
주인은
이씨
조선
경북궁의 주인
왕도
아니고
대한민국
청와대
대통령도
이제
진짜
우주의 주인
하나님이
되는 길
늘봄의 생활만
남았다.
봄나라
1권
책제목이
늘봄의 생활인데
상춘재와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게
신기하다.
상춘재 앞
녹지원
둥근
둘레길
안에는
여성성의 소나무
남성성의 소나무
음양이 짝이
되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성성의
소나무가
안방에
중심을
잡고
있고
남성성의
소나무는
옆(사랑방)으로
치우쳐 있다.
후천은
여성의
시대임을
말하나
보다.
두 소나무 앞
벤치에서는
남산도
보인다.
너머에는
센터로
이용
되는
용산이
있을
것이다.
이어진
느낌이다.
앞마당
녹지원의
그 넓은
잔디밭은
잔디깍기
기계가
알아서
쉼 없이
깍고
스스로
충전하면서
관리가
된다.
후천에는
일은
로봇기계이
하고
사람은
늘봄의 생활을 한다.
라는
원보님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
2.
9월 11일
늘봄의 생활
솔직히
상춘재에서
선생님 말씀을
듣는데도
늘봄의 생활이
도저히
땅때미가
안된다.
아는 척을
해봐도
별의 별
편법을
다 써
보아도
도대체
내 공부에
진척이
없다.
이것
저것
다
해 보아도
다 막히고
안됨에
어디까지
공부해야
되나
막혀
주말
내내
절망감이
찾아
온다.
그러다가
월요일
오늘
선생님
말씀으로
하는지
감이
잡혀
공부에
대한
막막했던
사라진다.
바라봄만
있다가
돌아봄의 생활로
바라봄과
돌아봄의 힘이
등등
해지면
바라보면서
동시에
돌아봄이 되는데
그것을
바라봄이라고 하지 않고
돌아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늘봄이에요?
여쭈어
보니
그렇다고
하신다.
돌아봄이 되기에
안과 밖이
하나다.
내외명철이다.
안을 나라고 하고
밖을 남이라고 하며
안의
나 이외의
밖은
남으로
끝없는
대립, 갈등, 투쟁이
벌어지는데
돌아봄이
되니
나와 남이
하나가
안과 밖으로
나와 남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희노애락에
끌리지
않게된다.
이것을
하나
하나님이라고
한다.
난
바라봄은
힘이
안 들여도
자연스럽게
남을 보는데
귀신인데
나를 보는데
캄캄하다.
몸돌아봄의
옵션을
걸고 걸어야
겨우 되는데
어느 순간
옵션이 없으면
몸돌아봄은
바라봄의 힘에
저 멀리
떠밀려가
사라져
버린다.
혼자 속으로
저절로
힘
안들이고
바라봄 만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생각했던적이
몇 번 있었다.
선생님께서
바라봄
밖으로
나가는 힘을
제압
할 수 있을
정도
안으로
당기고
잡아 당기는 힘
돌아봄의
등등해지면
하나이면서
제로가
된다고
없을 때
무언가
못
본것이
자꾸
쌓이고
쌓여서
막히는게
느껴지는데
속수무책이다.
되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쌓이는게
없을
것이
아닌가?
이
내가
꿈에도
되고싶은
경지인가?
말씀
듣고
나를
바라봄의
힘에 비해
택도 없다.
바라보는
늘봄의 경지
하나의 경지
되는데
에는
다른
왕도가
없고
특별한
방편과
편법도
없음이
이제야
수긍이 된다.
그래서
뭔 짓을
해도
계속
안되었던 것이다.
(생활중)
돌아봄의 힘을
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절로
턱없이
부족함을
알기에
공부하고
어떻게
공부
하는지가
처음으로
선다.
1.
9월 6일
상춘재
(常春齋)
서울(soul)을
만든
북한산
보현봉에
그
보현봉
산맥이
북악산과
이어져
북악산
밑에
터전을
잡은
서울(soul)의
주인은
이씨
조선
경북궁의 주인
왕도
아니고
대한민국
청와대
대통령도
아니고
이제
진짜
우주의 주인
하나님이
되는 길
상춘재
(常春齋)
늘봄의 생활만
남았다.
봄나라
1권
책제목이
늘봄의 생활인데
상춘재와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게
신기하다.
상춘재 앞
녹지원
둥근
둘레길
안에는
여성성의 소나무
남성성의 소나무
음양이 짝이
되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성성의
소나무가
안방에
중심을
잡고
있고
남성성의
소나무는
옆(사랑방)으로
치우쳐 있다.
후천은
여성의
시대임을
말하나
보다.
상춘재
두 소나무 앞
벤치에서는
남산도
보인다.
그
너머에는
봄나라
센터로
이용
되는
용산이
있을
것이다.
상춘재와
용산이
이어진
느낌이다.
상춘재
앞마당
녹지원의
그 넓은
잔디밭은
잔디깍기
기계가
알아서
쉼 없이
깍고
스스로
충전하면서
관리가
된다.
후천에는
일은
로봇기계이
하고
사람은
늘봄의 생활을 한다.
라는
원보님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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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9월 11일
늘봄의 생활
솔직히
상춘재에서
선생님 말씀을
듣는데도
늘봄의 생활이
도저히
땅때미가
안된다.
아는 척을
해봐도
별의 별
편법을
다 써
보아도
도대체
내 공부에
진척이
없다.
이것
저것
다
해 보아도
다 막히고
안됨에
어디까지
공부해야
되나
막혀
주말
내내
절망감이
찾아
온다.
그러다가
월요일
오늘
선생님
말씀으로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는지
감이
잡혀
공부에
대한
막막했던
절망감이
사라진다.
바라봄만
있다가
돌아봄의 생활로
바라봄과
돌아봄의 힘이
등등
해지면
바라보면서
동시에
돌아봄이 되는데
그것을
바라봄이라고 하지 않고
돌아봄이라고 하지 않는다.
선생님
그것이
늘봄이에요?
여쭈어
보니
그렇다고
하신다.
바라보면서
동시에
돌아봄이 되기에
안과 밖이
하나다.
내외명철이다.
안을 나라고 하고
밖을 남이라고 하며
안의
나 이외의
밖은
남으로
끝없는
대립, 갈등, 투쟁이
벌어지는데
바라봄과
동시에
돌아봄이
되니
안과 밖이
나와 남이
하나가
된다.
안과 밖으로
나와 남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희노애락에
끌리지
않게된다.
이것을
하나
하나님이라고
한다.
난
바라봄은
힘이
안 들여도
자연스럽게
된다.
남을 보는데
귀신인데
나를 보는데
캄캄하다.
몸돌아봄의
옵션을
걸고 걸어야
겨우 되는데
어느 순간
옵션이 없으면
몸돌아봄은
바라봄의 힘에
저 멀리
떠밀려가
사라져
버린다.
혼자 속으로
이렇게
저절로
되는
힘
안들이고
되는
바라봄 만큼
돌아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생각했던적이
몇 번 있었다.
선생님께서
바라봄
밖으로
나가는 힘을
제압
할 수 있을
정도
안으로
당기고
잡아 당기는 힘
돌아봄의
힘이
등등해지면
저절로
바라봄과
돌아봄이
동시에
되어
하나이면서
제로가
된다고
하신다.
바라봄만
있고
돌아봄이
없을 때
안으로
무언가
못
본것이
자꾸
쌓이고
쌓여서
막히는게
느껴지는데
속수무책이다.
바라봄과
돌아봄이
동시에
되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쌓이는게
없을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내가
꿈에도
되고싶은
경지인가?
선생님
말씀
듣고
나를
보니
바라봄의
힘에 비해
돌아봄의 힘이
택도 없다.
바라보는
동시에
돌아봄이
되는
늘봄의 경지
하나의 경지
하나님이
되는데
에는
다른
왕도가
없고
특별한
방편과
편법도
없음이
이제야
수긍이 된다.
그래서
내가
뭔 짓을
해도
계속
안되었던 것이다.
(생활중)
돌아봄의 힘을
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고
절로
되는
바라봄의
힘에 비해
내가
돌아봄의
힘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기에
어디까지
공부하고
어떻게
공부
하는지가
처음으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