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161. 생각을 돌아봄
봄161.
생각을
돌아봄
생각의
돌아봄을
통해
우리는
정체를
알게
된다.
생각이란
과거의
기억이나
선입관
고정관념으로부터
일어난다.
만약
과거가
없다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연상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을
장악하고
나를
끌고
다니므로
노예신세란
것을
마음
자각하게
행동을
이끌려고
한다.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행동으로
내딛지
못하는
자는
노예상태란
걸
알아야
좌뇌본위의
단계,
지적인
이해수준의
단계이므로
우뇌계발을
하여야
한
단계
나아가
주인이
될
수
있다.
생각에
의존하기만
하는
단계에서는
끊임없이
의식의
공간을
차지하므로
이원성
양면성으로
인하여
대립
갈등
투쟁의
길,
번뇌망상의
어리석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음의
분열인
동시에
자주권의
박탈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한
부자유하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굴레로부터
벗어나
동향을
바라보고
체험할
있을
것인가?
생각으로부터
다스리고
부릴
있으려면
하는가?
일차적으로
돌아봄의
능력을
키워야한다.
항상
동향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야
내면에
의식이
깨어있어야
지금
여기에서의
파악할
생각은
앞
대하여
뒷
판단
평가
심판하면서
주인행세를
도모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야
그리하여
심판을
어떤
결론을
내게
되면
고정관념,
선입관으로
잠재되고
입력되어
그
우리를
구속하는
율법이
되어
자유를
상실하게
그렇게
행동이
생각과
(윤리도덕이나 신념)
일치되는지
여부를
대조하게
되고
필경
관념을
지키지
못하면
자책과
질타를
가하여
자괴감에
빠지고
괴로워진다.
우리의
괴로움은
실상
환경조건이나
남으로부터
온다기
보다
최종결제권을
가진
소행이라는
놀라운
발견하게
그러므로
여기에서
결론이나
신념
등
생각이라도
마음에
머물게
하거나
집착을
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깨닫게
법도
세우거나
정하지
않아
얽매이거나
구속받지
대자유를
누리게
공부를
통하여
돌아봄으로서
무의식적
습관적으로
일어나고
머물거나
굴러가지
못하도록
텅비우게
마음이
텅비운
상태가
자리를
잡게
조짐에서부터
일어나
움직이고
변하는
전과정을
소상하게
의식하면서
체험하는
일이
가능하게된다.
이렇게
하면
일어나도
싸우는
또
다른
일으키지
않게
관찰하는
가능해지고
기억,
업,
까르마
등으로
축적되고
쌓이지
깨끗이
지워진다는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필터링이자
크리닝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닦는다고
것이다.
닦는
능력이
생기면
마음은
텅비어
맑고
밝고
광대무량해진다.
이러한
경지가
지속되면
자연
깨닫고
보존하게
깊어지고
드러나면
비로소
바라봄의
단계이고,
늘봄의
단계로
부리는
가능하여
되어야
물질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영적인
존재가
만물의
영장이다.
사람이
된
생각이나
물질에
끌리지
않고
물질을
있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진화가
이룩된
사람은
의존하여
하지
무심으로,
봄으로,
무위로
하므로
행동과의
사이에
간격과
틈이
없이
동시적
즉각적으로
행동한다.
아픔에
도사리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승패에도
무관하고
재산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모든
것이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없어
여기에
존재하게
매순간이
탄생의
순간이고
새로
시작하는
삶이므로
새로워
심심하거나
권태롭거나
답답하거나
두렵지
삶을
영위한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조화로워
전체로서의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는
우주인
자연인이
드디어
봄나라의
마스터가
중생제도의
길에
생애를
바쳐
헌신하게
종교의
형식을
핵심을
살리는
초종교를
이
땅에
이룩하는
거룩한
사도가
변화가
이루어진
사람이라야
후천세계
건설이
바로
존재이유라는
세상에
확실히
보여주게
봄161.
생각을
돌아봄
생각의
돌아봄을
통해
우리는
생각의
정체를
알게
된다.
생각이란
과거의
기억이나
선입관
고정관념으로부터
일어난다.
만약
과거가
없다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연상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이
마음을
장악하고
생각이
나를
끌고
다니므로
생각의
노예신세란
것을
마음
돌아봄을
통해
자각하게
된다.
생각이
행동을
이끌려고
한다.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행동으로
내딛지
못하는
자는
생각의
노예상태란
걸
알아야
한다.
좌뇌본위의
단계,
지적인
이해수준의
단계이므로
우뇌계발을
하여야
한
단계
나아가
생각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생각에
의존하기만
하는
단계에서는
생각이
끊임없이
의식의
공간을
차지하므로
생각의
이원성
양면성으로
인하여
대립
갈등
투쟁의
길,
번뇌망상의
길,
어리석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음의
분열인
동시에
자주권의
박탈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한
부자유하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생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생각의
동향을
바라보고
체험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생각을
다스리고
부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생각의
돌아봄의
능력을
키워야한다.
항상
생각의
동향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항상
내면에
의식이
깨어있어야
지금
여기에서의
마음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생각은
항상
앞
생각에
대하여
뒷
생각이
판단
평가
심판하면서
끊임없이
의식의
공간을
장악하고
주인행세를
도모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판단
평가
심판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게
되면
고정관념,
선입관으로
잠재되고
입력되어
그
생각이
우리를
구속하는
율법이
되어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행동이
그
생각과
(윤리도덕이나 신념)
일치되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대조하게
되고
필경
그
관념을
지키지
못하면
자책과
질타를
가하여
자괴감에
빠지고
괴로워진다.
우리의
괴로움은
실상
환경조건이나
남으로부터
온다기
보다
최종결제권을
가진
자기의
소행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이나
신념
등
한
생각이라도
마음에
머물게
하거나
집착을
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한
법도
세우거나
정하지
않아
얽매이거나
구속받지
않아
대자유를
누리게
된다.
마음
돌아봄
공부를
통하여
항상
생각을
돌아봄으로서
생각이
무의식적
습관적으로
일어나고
머물거나
굴러가지
못하도록
마음을
텅비우게
된다.
마음이
텅비운
상태가
자리를
잡게
되면
한
생각이
일어나는
조짐에서부터
일어나
움직이고
변하는
전과정을
소상하게
의식하면서
체험하는
일이
가능하게된다.
이렇게
하면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과
싸우는
또
다른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게
되어
관찰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기억,
업,
까르마
등으로
축적되고
쌓이지
않아
깨끗이
지워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생각의
필터링이자
크리닝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항상
이렇게
마음을
닦는
능력이
생기면
마음은
텅비어
맑고
밝고
광대무량해진다.
이러한
경지가
지속되면
자연
이것을
깨닫고
보존하게
된다.
이것이
깊어지고
드러나면
비로소
바라봄의
단계이고,
늘봄의
단계로
생각을
다스리고
부리는
일이
가능하여
생각의
주인이
된다.
이렇게
되어야
물질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영적인
존재가
된다.
만물의
영장이다.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생각이나
물질에
끌리지
않고
생각이나
물질을
다스리고
부릴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의식의
진화가
이룩된
것이다.
이렇게
된
사람은
생각에
의존하여
행동을
하지
않고
무심으로,
봄으로,
무위로
행동을
하므로
생각과
행동과의
사이에
간격과
틈이
없이
동시적
즉각적으로
행동한다.
이렇게
되면
아픔에
도사리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승패에도
무관하고
재산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사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이
한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사람은
과거가
없어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매순간이
탄생의
순간이고
새로
시작하는
삶이므로
항상
새로워
심심하거나
권태롭거나
답답하거나
두렵지
않는
삶을
영위한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조화로워
전체로서의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는
우주인
자연인이
된다.
이렇게
된
사람은
드디어
봄나라의
마스터가
되어
중생제도의
길에
생애를
바쳐
헌신하게
될
것이다.
종교의
형식을
벗어나
모든
종교의
핵심을
살리는
초종교를
이
땅에
이룩하는
거룩한
사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변화가
이루어진
사람이라야
후천세계
건설이
바로
봄나라의
존재이유라는
것을
세상에
확실히
보여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