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134.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이치(理致)에서 본 눈과 귀의 작용



봄134. 


동정일여의 

(動靜一如) 

이치에서 

(理致)

본 


눈과 

귀의 

작용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

(視覺障碍者) 

보다


귀가 

멀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가 

(聽覺障碍者)


더 

답답함을 

느낀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目)으로 


빛의 

입자적인 

(粒子的)

모양과 

색깔을 


봄에 

있어서는


실내에서의 

동선이나 

(動線)


걸어다니는 

길 

등의 


공간이 

(空間)


전면에 

(前面) 

국한되어 

(局限)

있으며 


걸어다니는 

길에 

놓여진 


장애물이 

(障碍物)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으로 


족하므로 


협소한 

(狹小) 

공간을 

봄으로 

충분하여 

(充分)


최대로 

보는 

시각이 

(視角)


180도 

이내이면 

(以內) 

(足)하므로


눈으로 

보는 

공간의 

넓이가 


비교적 

좁고 


길다란

공간만을 

보게 

되는 

반면

(反面)


(耳)는 


동서남북의 


사방, 

(四方)

팔방, 

(八方)


시방의 

(十方)


무한공간인 

(無限空間)


광대무량한 

(廣大無量)


입체적인 

(立體的)


(全) 

우주의 

(宇宙)

공간인 

(空間) 


둥근 

(圓)을  

감지하는 

(感知)


이근원통의 

(耳根圓通) 

기능이 

(機能)

있으므로


시각의 

(視覺)

장애자가 

(障碍者)

느끼는 


불편하고 

답답함 

보다


청각의 

(聽覺)

장애자가 

(障碍者) 

느끼는 


불편하고 

답답함이 


훨씬 

클 

것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理解) 

갈 

입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시각은 

(視覺) 


(動)하는 

생각과

결탁하여 

(結託)


노려보거나

깔보거나

째려보는

눈초리로


의사를 

표현하는


동적인 

(動的)

시각기관

(視覺器官)

이지만


자연의 

(自然) 

풍광을 

(風光)

바라보거나


미술작품을 

(美術作品)

감상할 

(鑑賞)

때는


고요하고 

푸근한


정적인 

(靜的)

정감으로 

(情感)

다가오는 

것은


동중정으로 

(動中靜)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하므로


(動)과 

(靜)이 

하나인

동정일여라고 

(動靜一如)

하는


하나(一)인 

우주적인 

이치가 

(理致) 

있기 

때문입니다.


청각은 

(聽覺)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이나


구애받지

(拘碍)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부동한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音)

받아들이기만 

하는


정적인 

(靜的)

감각기관

이지만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거나


음악을 

(音樂)

감상하노라면 

(鑑賞)


청각은 

(聽覺)

(靜)하지만


감동의 

(感動) 

물결이 

일어나거나


신바람이 

일어나서


몸에서 

춤이 

나오는 


(靜)한 

가운데 

(動)하여


크게 

요동치므로 

(搖動)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정중동으로 

(靜中動)


동정이 

(動靜)

하나인


동정일여라고 

(動靜一如)

하는


하나(一)의 

이치가 

(理致)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要約)


눈으로 


빛의 

입자적인 

(粒子的)

면인


사물의 

모양과 

색깔을 

보는


시각은 

(視覺)


비교적 

협소한 

(狹小) 

공간을 

(空間) 

감지하는데 

(感知)

(反)


귀로 

천지만물이 

내는 

소리인


파장과 

(波長)

파동을 

(波動)

듣는


청각은 

(聽覺)


광대무량한 

(廣大無量)

공간을 

감지하므로 

(感知)


시각장애자 

보다

청각장애자가 


답답함을 

느끼는

강도가 

(强度) 

크다는 

말이


이해가 

(理解)

가고


눈은 

동적이므로 

(動的)


자연을 

(自然)

바라보거나


그림을 

감상할 

(鑑賞)

때에


고요하고 

푸근한


정적인 

(靜的)

정서를 

(情緖) 

느끼게 

되고


귀는 

정적이므로 

(靜的)


가요나 

음악을 

들을 

때에


동적으로 

(動的)


희노애락

(喜怒哀樂)

이라는

감동의 

(感動) 

물결이


강력하게 

(强力) 

일어나는 

까닭은


동중정하고 

(動中靜)

정중동하는 

(靜中動)


동정일여라고 

(動靜一如)

하는


하나의 

이치가 

(理致)

있기 

때문인 

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으신 

부처님의 

형상을 

(形象)

나타낸


불상에 

(佛像)


이러한 

이치가

분명히 

나타나 

있나니


(目)은 


반쯤 


반개로 

(半開) 

조각되어 

(彫刻)

있으며


(耳)는 


시방의 

(十方)

공간을 

감지할 

(感知) 

수 

있는


거대한 

(巨大)

귀로

조각되어 

(彫刻) 

있는 

것이니


(動)하는 

눈을 

다 

뜨지 

않고


반만 

뜬 

눈으로 

만듦으로서


동중정을 

(動中靜) 

나타내고 

있으며


(靜)한 

귀가 


광대무량한 

(廣大無量)

시방의 

(十方)

공간을 

(空間) 


다 

감지하여야 

(感知) 

하는 

연고로 

(緣故)


귀를 

거대하게 

(巨大)

조각한 

(彫刻)

까닭을 


드디어 

알게 

되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