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55.
아픔과
아프지
않음이
둘인가?
하나인가?
우리가
바다를
본다는
것은
바다의
표면만
보고
하는
말입니다.
바다의
표면은
출렁거리지만
바다의
심연은
조금도
출렁거리지
않습니다.
표면과
더불어
심연을
함께
보아야
진정한
바다를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표면은
보이지만
심연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외부적으로
나타난
표면의
모양과
색깔과
소리는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외부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보이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심연의
고요는
외면과
내면을
관통하여
볼
수
있는
진일보한
감각계발,
영감의
눈,
제3의
눈이
떠져야
표면과
아울러
심연까지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겉만
볼
수
있고
영안이라야
(靈眼)
속까지
볼
수
있습니다.
물성의
빛은
표면에
쳐진
장벽을
뚫지
못하여
입자와
파장만을
볼
따름이고
영성의
빛이라야
벽을
차고
나가
속
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로
아픔만을
보고
느끼지
아프지
않음을
보고
느끼지
못합니다.
감성의
능력의
차이
입니다.
아픔을
지옥이라고
하면
아프지
않음은
천당극락
입니다.
지옥과
천당은
양(陽)과
음(陰)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존재의
실상입니다.
지옥을
양(陽)이라면
천당극락은
음(陰)이기에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0)이므로
실지로는
지옥이나
천당이
따로
없습니다.
지옥이
없다면
천당
극락도
따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픔이
없다면
아프지
않다는
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은
아픔과
아프지
않음이
짝을
이루면서
하나이고
제로라는
것
입니다.
하나란
둘이
각각이
아니고
묘하게
하나라는
말이고
제로란
둘도
없고
하나라는
것도
없어
텅비어
있다는
말
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지금까지
이고득락하기
(離苦得樂)
위한
모든
작략이
(作略)
멈추어지고
모든
유위법이
그치게
될
것
입니다.
나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려던
생각이
그치면서
본래
구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오직
안과
밖,
겉과
속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감성의
능력을
회복하였는가
못하였는가만
문제
입니다.
아픔과
아프지
않음
지옥과
천당이라는
양극화는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극화란
만들어낸
말인지라
본래
양극은
완전한
균형과
조화상태이니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헛고생일
뿐
입니다.
표면적
현상적으로는
양극화일지라도
내면적
본질적으로는
양극화가
아닌
합일인
(合一)
것
입니다.
마음이
몸을
늘봄의
생활을
통하여
밖으로
향하던
에너지의
방향을
안으로
돌린
다음
중심으로
밀고
들어가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문자답으로
보이는
아픔과
보이지
않는
아프지
않음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감성의
눈만
뜨면
그만
입니다.
고(苦)를
여의고
낙(樂)을
얻을
것이
아니라
고(苦)
가운데
낙(樂)이
있고
낙(樂)
가운데
고(苦)가
있어
완전무결한
균형(均衡)과
조화(調和)
그
자체이니
하늘에서
이루어진
바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봄55.
아픔과
아프지
않음이
둘인가?
하나인가?
우리가
바다를
본다는
것은
바다의
표면만
보고
하는
말입니다.
바다의
표면은
출렁거리지만
바다의
심연은
조금도
출렁거리지
않습니다.
표면과
더불어
심연을
함께
보아야
진정한
바다를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표면은
보이지만
심연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외부적으로
나타난
표면의
모양과
색깔과
소리는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외부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보이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심연의
고요는
외면과
내면을
관통하여
볼
수
있는
진일보한
감각계발,
영감의
눈,
제3의
눈이
떠져야
표면과
아울러
심연까지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겉만
볼
수
있고
영안이라야
(靈眼)
속까지
볼
수
있습니다.
물성의
빛은
표면에
쳐진
장벽을
뚫지
못하여
입자와
파장만을
볼
따름이고
영성의
빛이라야
벽을
차고
나가
속
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로
아픔만을
보고
느끼지
아프지
않음을
보고
느끼지
못합니다.
감성의
능력의
차이
입니다.
아픔을
지옥이라고
하면
아프지
않음은
천당극락
입니다.
지옥과
천당은
양(陽)과
음(陰)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존재의
실상입니다.
지옥을
양(陽)이라면
천당극락은
음(陰)이기에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0)이므로
실지로는
지옥이나
천당이
따로
없습니다.
지옥이
없다면
천당
극락도
따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픔이
없다면
아프지
않다는
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은
아픔과
아프지
않음이
짝을
이루면서
하나이고
제로라는
것
입니다.
하나란
둘이
각각이
아니고
묘하게
하나라는
말이고
제로란
둘도
없고
하나라는
것도
없어
텅비어
있다는
말
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지금까지
이고득락하기
(離苦得樂)
위한
모든
작략이
(作略)
멈추어지고
모든
유위법이
그치게
될
것
입니다.
나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려던
생각이
그치면서
본래
구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오직
안과
밖,
겉과
속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감성의
능력을
회복하였는가
못하였는가만
문제
입니다.
아픔과
아프지
않음
지옥과
천당이라는
양극화는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극화란
만들어낸
말인지라
본래
양극은
완전한
균형과
조화상태이니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헛고생일
뿐
입니다.
표면적
현상적으로는
양극화일지라도
내면적
본질적으로는
양극화가
아닌
합일인
(合一)
것
입니다.
마음이
몸을
늘봄의
생활을
통하여
밖으로
향하던
에너지의
방향을
안으로
돌린
다음
중심으로
밀고
들어가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문자답으로
보이는
아픔과
보이지
않는
아프지
않음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감성의
눈만
뜨면
그만
입니다.
고(苦)를
여의고
낙(樂)을
얻을
것이
아니라
고(苦)
가운데
낙(樂)이
있고
낙(樂)
가운데
고(苦)가
있어
완전무결한
균형(均衡)과
조화(調和)
그
자체이니
하늘에서
이루어진
바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