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41. 무문관 제 1칙 조주 무자

유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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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41. 

무문관 

제 1칙 


조주 무자



서언(序言):

 

깨달음의 

가르침으로서

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발생한 

선불교야말로


인류의 

정신문화의 

꽃이므로


정신을 

깨닫는

방법으로


화두공안법으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겉도는 

생각을


이 생각 

저 생각을

합하여


한 생각, 

의문, 

의단(疑團)으로 

뭉쳐


일심(一心)을 

만든

다음


일심의 

지속을 

통하여


의심을 

타파하고


무심(無心)

정신을 

깨닫게 

하는


곧장 

가는 

입니다.

 

단지

의문이 

걸리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전 

인류를 

남김없이

이끌어갈 

수 

있는

보편적인

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봄나라에서는

12권의 

책을 

통하여

육체의 

속성인

생각의

모드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계적으로

생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사색의 

차원에 

이르게 

한 

다음


정신의

속성인

감각의 

모드로 

자연스럽게 

바뀌도록 

하여


정신을 

깨닫게 

합니다.

 

감각의 

모드로 

전환한 

사람이


화두공안법과도 

통하게

하기 

위하여


선불교의 

핵심인

무문관을 

제창(提唱)하는

바이니


진리는

하나임을

증거하기 

바랍니다.

 

 

 

본칙

조주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 

(無)라고 

대답했다.

 

불성이란

본성을 

말함이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항시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바탕소식을 

이름

입니다.

 

진리일진대 

두두물물 

형형색색이

천지만물이 


진리를 

떠나 

존재할리

없으니


개라고 

해서 

불성이 

존재하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했을까요?

 

있다

없다는 

말은

생각의

이원성이고


감각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이므로

일원성인지라


있다

없다가 

없습니다.

 

생각에는 

있다 

없다가 

있지만


감각에는 

있다

없다가 

없으므로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없다고 

대답한 

것은

생각으로 

말하는

있다의 

상대적인 

없다가 

아닌


있다

없다를 

초월하여


있다 

없다가 

없는


절대의 

없다인


순수의식

감각을 

말함이요,

대무심을 

말합니다.

 

중은

생각모드에서 

물었고


조주스님은

감각모드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중은

생각의 

언어를 

구사한 

것이고


조주스님은

감각의 

언어를 

구사한 

것입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픔에 

즈음하여


생각의 

모드에서는

아픔을 

싫어하고 

기피하고

거부하고

저항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아픔 

가운데 

번뇌를 

일으켜 

괴롭지만


감각의 

모드에서는

아픔을 

싫어하고 

기피하지 

않고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아픔 

가운데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아파볼 

뿐 

괴롭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아픔이라는 

현상을

온통 

받아들여

감각할 

뿐이어서


아픔은 

고정불변하지

않은

현상인지라


아프지

않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어둡다가 

밝았다가 

하고


덥다 

춥다 

하는 

것은

자연현상인지라


생각으로 

선택한다고 

되어질 

일이 

아니고


어두움을 

감각하여 

편안함을 

누리고


밝음을 

감각하여 

명료함을 

누리고


따뜻함을

감각하여

안온함을 

누리고


차가움을 

감각하여 

냉철함을 

누리면


모두가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아픔이 

있기에

아프지 

않음도 

존재합니다.


아픔이 

없다면

아프지 

않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픔에

즈음하여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생각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일로서


에너지의

낭비와 

소비에 

불과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라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은


육체를 

감각하지 

않아


정신이 

나가는 

순간

일어납니다.

 

정신이 

육체를 

감각하여 

떠나지 

않으면


정신이 

들어 

본성이 

회복되어


생각이 

텅비어진 

가운데 

광명이 

가득차서


허전함이 

없고,

욕심이 

없고,

심심하거나 

쓸쓸하거나 

외로움도 

없고,

지겨움도

없고,

그리움도 

없고,

슬픔이나

서러움이나

억울함도 

없고,

두려움이나 

후회함이나

불평불만이 

없어,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없어


대무심

입니다.

 

이른바

절대의 

입니다.


이른바 

니르바나

입니다.

 

절대의

무란

정신으로서


육체가 

음인

여성 

가운데도

있고


육체가

양인

남성 

가운데도 

있어


남성과 

여성이 

다르지

않아

하나라고 

말하고


하나인 

정신에는


음양이 

따로 

없어


제로

입니다.

 

정신은

하늘과 

광명

음양이 

하나이면서


음양이 

따로 

없어 

제로인지라


일심이면서 

무심입니다.

 

둘이 

하나인 

동시에


하나라고 

하는

것도 

없는

제로

입니다.

 

이것이

조주스님이 

말한


없을 

무자


(無)

입니다.

 

생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감각으로 

보고 

알아차리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