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17. 자아탐구를 통한 깨달음의 길
봄17.
자아탐구를
통한
깨달음의
길
「나」라고
하는
자의식(자아)의
눈,
동물의
눈은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밖으로
열려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속과
안까지
볼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다.
사람은
반드시
잠재된
제3의
눈을
떠야
한다.
만약
이
일을
등한시하면
인류는
약육강식하는
(弱肉强食)
고등동물의
수준을
못
벗어날
것이다.
물은
하늘로
부터
떨어져
산골짜기로
모여
개울물이
되고
시냇물이
되어
흐르다가
강물이
바다로
간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
구름이
떠돌다가
비가
땅으로
떨어진다.
이와같은
끝없이
반복하고
내려가고
수증기는
올라간다.
내려갈수록
꾸정물이
되므로
바다에서는
소금으로
부패와
악취를
방지하면서
저장하여
두었다가
올려
보낸다.
공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더러움을
떨구어
자신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왕래하는
데
불편없는
몸으로
청소하는
한편
공기와
흙의
습도를
조절하고
땅
위에
사는
동식물을
살리는
살림살이를
지구는
물과
흙과
불로
이루어져
있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물(흙, 공기, 불)이
최초로
생긴
곳,
솟아나온
곳이
있을
것
아닌가?
우리는
물이
솟아오른
샘터랄까,
근원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근원으로
가는
길은
물길
따라
길이
아니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당도하기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고
상류로
올라가야
잠시도
쉬지
올라가지
떠내려가
그
곳에
당도할
없기
불철주야
외면을
「바라보는자」를
돌아보다가
보면,
어느날,
「돌아보는자」,
「거슬러
올라가는자」가
갑자기
진짜
사라진다.
지금까지
분명히
존재해왔던
「추구하던자」가
(이고, ego)
거짓말
처럼
사라지는
그리하여
꿈에도
그리던
물의
고향,
샘터,
근본,
존재의
고향에
당도하는
자아가
없다는
사실이
보이는
눈이
떠진
이것은
길이다.
봄에
싹이
나오고
여름에
무성하고
가을에
떨구고
겨울에
뿌리로
돌아갔다가
봄이
되면
싹으로
나온다.
봄에서
겨울로
가을로
여름으로,
역(逆)으로
한바퀴
「돌아봄」으로
(seeing, watching)
와
봐야,
천지가
「늘봄」인
줄
알게
된다.
그렇게
되어야,
떠내려가도
조금도
잘못이
없다.
올라
근원에
도달하면
다시금
흘러내린다.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는
가
보아야
안다.
흘러가는
것이
그냥
내맡기고
가만히
도리를
드디어
몽땅
내맡김으로서
다한다.
철들지
않은
가만
있지
못하고
부시럭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하고
고생이
막심해진다.
철이
들지
않아서
그렇다.
들려면
고생을
해보아야
고생
끝에
낙이다.
그러므로
「자아탐구」를
통해
없는
확실히
깨달아야
「산(山)절로,
수(水)절로,
산수간에
(山水)
나도
절로」
라고
봄17.
자아탐구를
통한
깨달음의
길
「나」라고
하는
자의식(자아)의
눈,
동물의
눈은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밖으로
열려있다.
그러나
사람의
눈,
마음의
눈은
속과
안까지
볼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다.
사람은
반드시
잠재된
마음의
눈,
제3의
눈을
떠야
한다.
만약
이
일을
등한시하면
인류는
약육강식하는
(弱肉强食)
고등동물의
수준을
못
벗어날
것이다.
물은
하늘로
부터
떨어져
산골짜기로
모여
개울물이
되고
시냇물이
되어
흐르다가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간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비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물은
이와같은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물은
내려가고
수증기는
올라간다.
물은
내려갈수록
꾸정물이
되므로
바다에서는
소금으로
부패와
악취를
방지하면서
저장하여
두었다가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낸다.
공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더러움을
떨구어
자신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물은
하늘과
땅을
왕래하는
데
불편없는
몸으로
하늘과
땅을
청소하는
한편
공기와
흙의
습도를
조절하고
땅
위에
사는
동식물을
살리는
살림살이를
한다.
지구는
물과
흙과
공기와
불로
이루어져
있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물(흙, 공기, 불)이
최초로
생긴
곳,
솟아나온
곳이
있을
것
아닌가?
우리는
물이
솟아오른
샘터랄까,
근원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근원으로
가는
길은
물길
따라
가는
길이
아니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잠시도
쉬지
않고
올라가지
않으면
떠내려가
그
곳에
당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철주야
외면을
「바라보는자」를
돌아보다가
보면,
어느날,
「돌아보는자」,
「거슬러
올라가는자」가
갑자기
진짜
사라진다.
지금까지
분명히
존재해왔던
그
「추구하던자」가
(이고, ego)
거짓말
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꿈에도
그리던
물의
고향,
샘터,
근본,
존재의
고향에
당도하는
것이다.
자아가
없다는
사실이
보이는
것이다.
마음의
눈이
떠진
것이다.
이것은
자아탐구를
통한
깨달음의
길이다.
봄에
싹이
나오고
여름에
무성하고
가을에
떨구고
겨울에
뿌리로
돌아갔다가
다시
봄이
되면
싹으로
나온다.
봄에서
겨울로
가을로
여름으로,
역(逆)으로
한바퀴
「돌아봄」으로
(seeing, watching)
와
봐야,
천지가
「늘봄」인
줄
알게
된다.
그렇게
되어야,
흐름에
떠내려가도
조금도
잘못이
없다.
거슬러
올라
근원에
도달하면
물은
다시금
흘러내린다.
물이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는
근원에
가
보아야
안다.
물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흐름에
내맡기고
가만히
있는
도리를
드디어
알게
된다.
몽땅
흐름에
내맡김으로서
물은
물의
도리를
다한다.
철들지
않은
사람은
가만
있지
못하고
부시럭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하고
고생이
막심해진다.
철이
들지
않아서
그렇다.
철이
들려면
고생을
해보아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다.
그러므로
「자아탐구」를
통해
자아가
없는
도리를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산(山)절로,
수(水)절로,
산수간에
(山水)
나도
절로」
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