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60. 대아와 소아
봄60.
대아와
소아
대아는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의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인간과
동식물,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
조차
거기에는
말하자면
대아가
하늘이다.
없다면
우주도
없고
삶도
삼라만상은
벌이는
파노라마이다.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대아를
것이다.
거듭난다는
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소아는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육체본위,
사고본위의
자기를
지칭할
때
쓰는
그러므로
항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유발하기
일쑤이다.
생각을
위주로
생각에
의존하며
사는
분열과
대립
갈등
투쟁이라고
하는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한계성
때문에
죽음의
공포와
슬픔이라고
멍에를
안고
산다.
일어난
파도는
소멸되어
바다로
흡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제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소멸될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로
여기지
않는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자기의
마음이나
몸을
더
이상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버리는
그러한
사고방식
행동양식
고정관념을
인식해
온
오랜
관념
집착을
소아의식을
버리면
거기에
존재한다.
파도가
소멸되었다고
해서
바다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은
바다라고
존재에는
아무런
영향이
참다운
자기가
아니라는
자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사실에
개념이
정리되면
소아의식에
의한
삶이
멈추어지고
주도하는
대인의
시작된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가야
길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할
길이다.
몸은
파도와
같아서
비록
사라진다
해도
대아,
본연의
자기,
생명
자체는
결코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
슬픔의
문제는
일시에
해결되는
또한
이렇게
되면
사람
뿐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대아라고
하나의
바다에서
일고지는
파도라는
알게
되어
존재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식에
까지
이르게
사람,
다시
말하면
거듭난
사람의
의식이
바로
우주의
의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된
사람은
소아본위의
인간과는
전적으로
격이
다르다.
세월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했던
은퇴하고
대아의
품안에
돌아오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은
몫이
기억을
가상적으로
존재하던
일거일동을
순간
바라보는
주시자의
역할만
담당한다.
이
단계에서는
직접
관할하기
소아에게는
기억의
재료가
될
수
따라서
반성이나
판단
평가
심판의
대상이
소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전지전능한
행위를
어찌
관견으로
(管見)
헤아릴
있겠는가!
대아적인
소아적이고
세속적인
삶을
남김없이
비워야
드디어
열리는
세계다.
세계에만
들어서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는
기적
아닌
기적이
벌어진다.
세계는
고요하고
풍요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행복에
넘친
낙원이다.
천당이다.
극락이다.
대동세계다.
이미
와
있다.
다만
우리들
인간이
소아에서
주인을
바꾸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보이는
창조한
세계이므로
좋게
보이고
이쁘게
미운
하나도
없게
세계이기
봄60.
대아와
소아
대아는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의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인간과
동식물,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
조차
거기에는
없다.
말하자면
대아가
하늘이다.
대아가
없다면
우주도
없고
삶도
없다.
삼라만상은
대아가
벌이는
파노라마이다.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대아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거듭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거듭나야
하는가?
소아는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육체본위,
사고본위의
자기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소아는
항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유발하기
일쑤이다.
생각을
위주로
생각에
의존하며
사는
소아는
분열과
대립
갈등
투쟁이라고
하는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소아는
그
한계성
때문에
항상
죽음의
공포와
슬픔이라고
하는
멍에를
안고
산다.
일어난
파도는
소멸되어
바다로
흡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제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소아를
자기로
여기지
않는다.
소아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자기의
마음이나
몸을
더
이상
자기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방식
행동양식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소아를
자기로
인식해
온
오랜
관념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소아의식을
버리면
거기에
대아가
존재한다.
파도가
소멸되었다고
해서
바다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짐은
바다라고
하는
존재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러므로
소아는
참다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면
소아의식에
의한
삶이
멈추어지고
대아가
주도하는
대인의
삶이
시작된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가야
하는
길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가야
할
길이다.
몸은
파도와
같아서
비록
사라진다
해도
바다라고
하는
대아,
본연의
자기,
생명
자체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삶의
공포와
슬픔의
문제는
일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되면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삼라만상이
대아라고
하는
하나의
바다에서
일고지는
파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모든
존재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식에
까지
이르게
된다.
깨달은
사람,
다시
말하면
대아로
거듭난
사람의
의식이
바로
우주의
의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사람은
소아본위의
인간과는
전적으로
격이
다르다.
오랜
세월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했던
소아는
은퇴하고
대아의
품안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삶은
대아의
몫이
된다.
그러므로
기억을
위주로
가상적으로
존재하던
소아는
자기의
일거일동을
순간
순간
바라보는
주시자의
역할만
담당한다.
이
단계에서는
대아가
직접
관할하기
때문이다.
대아의
삶은
소아에게는
기억의
재료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반성이나
판단
평가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은
소아적인
사람의
판단
평가
심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대아의
행위를
어찌
소아적인
관견으로
(管見)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아적인
삶은
소아적이고
세속적인
모든
삶을
남김없이
비워야
드디어
열리는
세계다.
이
세계에만
들어서면
모든
것이
자기의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는
기적
아닌
기적이
벌어진다.
이
세계는
고요하고
풍요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행복에
넘친
낙원이다.
천당이다.
극락이다.
대동세계다.
이
세계는
이미
와
있다.
다만
우리들
인간이
소아에서
대아로
주인을
바꾸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보이는
세계다.
대아의
세계는
자기가
창조한
세계이므로
모든
것이
좋게
보이고
이쁘게
보이는
세계다.
미운
것이
하나도
없게
보이는
세계다.
자기가
창조한
세계이기
때문이다.